피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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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사 대성당은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대성당으로, 1063년 건축가 부셰토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이슬람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피사 해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1118년 봉헌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증축과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부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이 있으며, 피사 세례당, 피사의 사탑과 함께 피사 대성당 광장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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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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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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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피사 원수도 대성당 마리아 승천 대성당 |
현지 명칭 | Il Duomo di Santa Maria Assunta (이탈리아어) |
다른 이름 | 두오모 디 피사 (Duomo di Pisa) |
위치 | 피사 (이탈리아) |
종교 | 가톨릭 교회 |
교구 | 라틴 교회 |
대교구 | 피사 |
건축 양식 | 피사 로마네스크 |
기공 | 1063년 |
완공 | 1092년 |
축성일 | 1118년 9월 26일 |
건축가 | 부스케토와 라이날도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건축 | |
건축 유형 | 주교좌 성당 (대성당) |
재료 | 벽돌, 돌, 대리석 |
추가 정보 | |
광장 명칭 (이탈리아어) | Piazza del Duomo, Pisa |
공개 여부 | 공개 |
2. 역사
피사 대성당은 여러 차례 복원과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95년 화재로 지붕이 교체되었고, 지암볼로냐(Giambologna)의 작업장 출신 조각가들이 정면에 세 개의 청동 문을 제작했다. 18세기 초에는 피사의 복자와 성인들의 이야기를 묘사한 대형 그림인 "콰드로니(quadroni)"로 대성당 내벽 장식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당대 주요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시민 단체가 특별 자금을 조달했다.
19세기에도 내외부 개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특히 정면의 원래 조각상들은 복제품으로 교체되었으며, 원본은 현재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599년부터 1601년 사이에는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의 설교단이 해체되었다가 1926년에 재조립되어 대성당으로 돌아왔다(계단을 포함한 일부 부품은 누락됨). 루포 디 프란체스코(Lupo di Francesco)가 만든 헨리 7세의 기념비는 산 라니에리 문 앞에서 발견되어 나중에 더 단순하고 상징적인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2. 1. 건립 배경
피사 대성당의 건설은 1063년(당시 피사력으로는 1064년) 건축가 부셰토(Buscheto)에 의해 시작되었으며,[2] 시칠리아에서 무슬림과 싸워 얻은 전리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대성당은 고전, 롬바르드-에밀리아, 비잔틴, 이슬람 등 다양한 양식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 피사 상인들의 국제적인 활동을 반영한다. 같은 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St. Mark's Basilica) 재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예배 장소를 건설하려는 두 해양 공화국 간의 격렬한 경쟁을 보여준다.피사 대성당은 초기 중세 시대 피사의 성벽 밖에 세워졌다. 1092년 대성당은 피사의 다고베르트(Dagobert of Pisa) 대주교가 교황 우르바노 2세(Pope Urban II)로부터 대주교 칭호를 받으면서 대주교좌 성당으로 선포되었다. 대성당은 1118년 교황 겔라시오 2세(Pope Gelasius II)에 의해 봉헌되었다.
11세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이 시민에 의한 자치 도시 시대가 되자, 당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공화국의 도시 피사는 루카, 피렌체와 함께 번영하며 토스카나 지방에서 세력을 자랑했다.[14] 이 시대 각지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가 확립되었고, 그 부와 권세의 크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피사 대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15]
대성당은 1064년, 도시 국가 피사가 이슬람 군과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다투어 대승한 "팔레르모 해전"을 기념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16] 그리스인 부셰토(Buscheto)의 설계 및 지휘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고, 12세기에 라이날도(Rainaldo)가 파사드를 완성했다. 대성당 건설에는 1064년부터 1118년까지 약 반세기가 걸린 것으로 여겨진다.[17]
2. 2. 건설 과정
피사 대성당의 건설은 1063년(당시 피사력에 따르면 1064년)[2] 건축가 부셰토(Buscheto)에 의해 시작되었다. 건설 비용은 1063년 시칠리아에서 무슬림과 싸워 얻은 전리품으로 충당했다.[2] 대성당은 고전, 롬바르드-에밀리아, 비잔틴, 이슬람 등 다양한 양식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피사 상인들의 국제적인 활동을 반영한 결과였다. 같은 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St. Mark's Basilica) 재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예배 장소를 건설하려는 두 해양 공화국 간의 경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피사 대성당은 초기 중세 시대 피사의 성벽 밖에 세워졌다. 선택된 지역은 이미 롬바르드 시대에 묘지(necropolis)로 사용되었으며, 11세기 초에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로 명명될 예정이었던 교회가 세워졌지만 완공되지 못했다. 부셰토의 새로운 대성당은 처음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라고 불렸다가 공식적으로 '산타 마리아 아순타(Santa Maria Assunta)'로 명명되었다.
2000년대 초 발굴 조사에서 11세기 후반에 건설이 시작된 건축 구조물이 발견되었으며, 석회암과 대리석 블록으로 된 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
1092년 대성당은 대주교좌 성당으로 선포되었고, 1118년에 교황 겔라시오 2세(Pope Gelasius II)에 의해 봉헌되었다.
12세기 초, 건축가 라이날도(Rainaldo)의 지휘 아래 대성당이 확장되었다. 그는 부셰토의 원래 양식과 일치하는 세 개의 베이를 추가하여 신랑의 길이를 늘이고, 횡랑을 확장했으며, 새로운 정면을 계획했다.[4] 보난노 피사노(Bonanno Pisano)가 만든 주요 문에 있는 청동 노커에 적힌 날짜에 따르면 1180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1187년 12월 교황 선거는 피사 대성당에서 열렸으며, 교황 클레멘트 3세(Pope Clement III)가 선출되었다.[5]
대성당의 현재 모습은 여러 시대에 걸쳐 진행된 수많은 복원 사업의 결과이다. 1595년 화재 이후 지붕이 교체되었고, 정면의 세 개의 청동 문이 제작되었다. 18세기 초에는 대성당 내벽 장식이 새롭게 시작되었고, 19세기에도 내부 및 외부 개조를 포함한 후속 개입이 있었다.
11세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이 시민에 의한 자치 도시 시대가 되자, 당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공화국의 도시 피사는 루카, 피렌체와 함께 번영하며 토스카나 지방에서 세력을 자랑했다.[14] 당시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가 확립되었고, 그 부와 권세의 크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피사 대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15]
대성당은 1064년, 도시 국가 피사가 이슬람 군과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다투어 대승한 "팔레르모 해전"을 기념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16] 그리스인 부셰토(Buscheto)의 설계 및 지휘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고, 12세기에 라이날도(Rainaldo)가 파사드를 완성했다. 대성당 건설에는 1064년부터 1118년까지 약 반세기가 걸린 것으로 여겨진다. 1152년에는 세례당이, 1173년에는 종탑이 대성당 주변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각 건축물은 14세기 후반에 완성되어 현재의 두오모 광장이 탄생했다.[17]
3. 건축 양식
피사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당시 이탈리아 건축의 특징처럼 로마 시대 건축 양식을 일부 도입했다.[15] 이탈리아 곳곳에 남아 있던 로마 시대 건축의 폐허에서 건축 자재와 양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비잔틴 문화의 영향도 받아 여러 시대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었다.[15]
원래 건축 계획은 중앙 돔이 있는 웅장한 그리스 십자가형이었지만, 현재는 중앙 네이브를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씩의 측랑이 있는 라틴 십자가형이다. 후진(Apse)과 횡단부는 세 개의 네이브를 가지고 있다. 내부는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이 번갈아 나타나는 층과 무어인의 영향을 받은 타원형 돔, 높이 솟은 뾰족 아치 때문에 모스크와 비슷한 공간감을 준다. 네이브에는 높이 솟은 두 개의 마트로네움이 있는데, 단단하고 균일한 화강암 기둥은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건축가 부셰토는 이슬람과 아르메니아의 영향을 받았다.[6]
세례당은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지름 약 35m, 높이 54.85m이다. 1152년 디오티살비(Diotisalvi)의 설계로 건설이 시작되어 완공까지 200년이 걸렸다. 건물 하부는 열주와 아치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이 사용되었고, 상부는 첨탑을 가진 고딕 양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건축 도중 니콜라 피사노와 조반니 피사노 부자가 고딕 양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세례당은 긴 잔향으로 유명하며, 직원들의 성악 시연이 1시간에 2회 진행된다.
3. 1. 건축 기술
피사 대성당은 4세기에 시작된 초기 기독교 교회 형식을 이어받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 단순한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중앙 통로와 측랑(측면 복도)을 두고, 여기에 직각으로 뻗어 나가는 횡랑(십자형 교차 부분)을 더해 십자형 평면을 이룬다.[15]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설계된 대성당은 합리주의 건축의 걸작으로도 불린다.[13] 중앙 통로는 5랑식, 횡랑은 3랑식 구조이다.벽돌과 돌로 지어진 돔(중앙의 탑)은 1090년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피렌체 세례당과 같은 시기이다. 원래 십자형 교차부는 외부로 둘러싸인 탑이었으나, 현재는 외벽 없이 석조 돔이 드러나 있다. 이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14세기 토스카나 지방 교회 양식을 도입한 것이다. 돔을 둘러싼 아케이드는 1383년에 완성되었다.[18]
석조 볼트 기술의 발전으로 중앙 통로와 측랑의 창문을 크게 만들 수 있었다.[15] 또한, 열주랑(기둥을 일렬로 세운 복도)을 사용하여 벽의 두께를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석조 볼트와 열주랑 기술은 채광과 장식을 개선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후대 유럽의 고딕 건축에서 극대화된다.[15]

파사드(정면) 바깥쪽에 떠오르는 듯한 아치와 기둥은 반복 배열을 통해 벽에 가해지는 하중을 줄인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 고딕 시대 건축의 특징이 된다.[15] 정면 하부와 측면에는 개구부(창문 등)가 없는 아치가 연속되고, 파사드 상부는 4층의 개랑(열린 복도)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개랑은 피사-루카 양식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12]
4. 내부 구조
피사 대성당의 내부는 원래 그리스 십자가형으로 계획되었으나, 현재는 중앙 네이브를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씩의 측랑이 있는 라틴 십자가 형태이다. 후진과 횡단부는 세 개의 네이브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이 번갈아 가며 사용되었고, 무어인의 영향을 받은 타원형 돔과 높이 솟은 뾰족 아치는 모스크와 유사한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높이 솟은 두 개의 마트로네움은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단단한 화강암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가 부셰토는 이슬람과 아르메니아의 영향을 받았다.[6]
4. 1. 주요 공간
피사 대성당의 내부는 앞쪽에서 중앙의 네이브를 양쪽의 두 개의 측랑이 측면에서 감싸고 있으며, 세 개의 네이브로 된 트랜셉트와 앱스가 있다. 흰색과 검은색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코린트식 주두를 가진 회색 대리석으로 된 단일 기둥들이 있다. 17세기 도메니코와 바르톨로메오 아티치아티가 만든 금박으로 장식된 채색된 나무 천장틀 천장이 있으며,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전의 천장은 아마도 나무 트러스 구조였을 것이다.[6]


중앙 네이브와 트랜셉트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돔의 내부는 엔카우스틱[7][8]이라는 희귀한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장식되어 있으며, 피사의 화가 오라치오와 지롤라모 리미날디(1627~1631)가 그린 영광 속의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돔의 복원은 2015년에 시작되어 2018년에 완료되었다.[9]
네이브와 앱스 사이에 있는 화강암 코린트식 기둥들은 팔레르모의 모스크에서 가져온 것으로, 1063년 노르만족과 함께 이 도시의 무슬림을 공격하여 성공한 후 피사가 가져온 전리품이다.
앱스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이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큰 모자이크는 1302년 치마부에가 그린 성 요한의 얼굴로 유명하며, 1595년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작품은 치마부에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칠리아의 체팔루와 몬레알레에 있는 비잔틴과 노르만 교회의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프란체스코 다 피사가 대부분 제작한 이 모자이크는 빈치노 다 피스토이아가 왼쪽의 성모 마리아를 완성했다(1320년).
1595년 화재에서 파괴되지 않은 중세 작품들 중에는 피사의 화가 마에스트로 디 산 토르페가 그린 승리의 아치에 있는 성모자 프레스코화와 코스마티 바닥이 있다. 라치오 지역 외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작품으로,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기 위해 여러 색깔의 대리석을 상감한 작품이다(12세기 중반). 후기 중세 시대의 다른 프레스코화 조각들도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네 개의 중앙 기둥 중 하나에 있는 “성 예로니모”와 입구 근처의 기둥 중 하나에 있는 “세례자 요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이 있으며, 입구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다.
- 바실리카 양식(십자형 평면 형태)
: 4세기에 시작된 초기 기독교 교회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단순한 직사각형을 기초로 하여, 중앙 통로와 측랑을 가지고, 거기에 직각으로 뻗어 나가는 횡랑을 더하여 십자형을 이룬다.[15] 라틴 십자형 평면 형태로 설계된 대성당은 합리주의의 걸작이라고도 불린다.[13] 중앙 통로는 5랑식이고, 횡랑은 3랑식이다. 교차부에는 타원형의 돔이 있으며, 팔각형의 딤블로 덮여 있다.[12]
- 돔(중앙의 탑)
: 벽돌과 돌로 지어진 돔은 피렌체 세례당과 같은 시기인 1090년에 건립되었다. 십자형 교차부는 원래 위까지 외부로 둘러싸인 탑이었지만, 현재는 외벽이 없고, 석조 돔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14세기 토스카나 지방의 교회 양식을 도입한 것이다. 돔을 둘러싼 아케이드는 1383년에 완성되었다.[18]
- 세례당
: 세례당은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지름 약 35m, 높이 54.85m이다. 1152년 디오티살비(Diotisalvi)의 설계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완공까지 200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하부는 열주와 아치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이 채택되었고, 상부는 첨탑을 가진 고딕 양식이다. 이는 건축 중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 부자가 고딕 양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긴 잔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직원들의 성악 시연이 1시간에 2회 진행되고 있다.
4. 2. 주요 예술 작품
피사 대성당에는 주목할 만한 예술 작품들이 많이 있다.- 치마부에의 모자이크: 후진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이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 모자이크는 1302년 치마부에가 그린 성 요한의 얼굴로 유명하다.[6] 이는 치마부에의 마지막 작품이자,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시칠리아의 체팔루와 몬레알레에 있는 비잔틴 및 노르만 교회들의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프란체스코 다 피사가 대부분 제작했으며, 빈치노 다 피스토이아가 왼쪽 성모 마리아를 완성했다(1320년).

- 조반니 피사노의 설교단: 1302년에서 1310년 사이에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가 제작한 설교단은 13세기 상상력의 가장 웅장한 이야기 중 하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6] 약간 곡선이 있는 패널에는 그리스도의 삶의 에피소드가 표현력 있는 언어로 조각되어 있다. 이 설교단은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의 피사 세례당 설교단, 시에나 대성당 설교단(Siena Cathedral Pulpit) 등과 유사하지만, 패널의 곡선 형태는 이런 유형의 작품 중 최초이다.

- 기타 작품:
- 1595년 화재에서 살아남은 중세 작품으로는 피사의 화가 마에스트로 디 산 토르페가 그린 승리의 아치 위 성모자 프레스코화와 코스마티 바닥이 있다.[6]
- 주 제단 뒤 갤러리의 27점 그림들은 구약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하며, 16세기와 17세기에 안드레아 델 사르토, 일 소도마, 도메니코 베카푸미 등 토스카나 화가들이 주로 제작했다.[6]
- 주 제단의 청동 십자가, 잔볼로냐의 대리석 난간 끝 천사 모양 촛대, 조반니 바티스타 포지니 디자인의 은 감실(1678-86년)이 있다.[6]
- 바로크 양식으로는 시에나 화가 프란체스코 바니의 '성체 논쟁'과 제노바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성인과 십자가'가 있다.[6]
- 13세기 작품 '오르간 아래의 성모'는 볼테라 출신 베를링히에로 베를링히에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6]
- 대리석 패널: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패널 조합 장식이 파사드의 특징이다. 코린트식 주두를 채용하는 등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을 모방했지만, 세부는 조잡하고 장식은 풍부하여 고전 양식 인상은 약하다.[15]
5. 외부 구조
피사 대성당의 외부는 다양한 건축 양식과 풍부한 장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 신랑: 신랑 양쪽에는 종교적인 그림이나 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며, 성인에게 봉헌하는 예배실 등이 설치된 측랑이 부속되어 있다.[18] 이러한 배치는 석조 볼트와 신랑 벽을 지탱하는 열주에 의해 가능해졌다.
- 후진: 후진의 반원개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3세기 초에 제작되었다.[19]
5. 1. 파사드(Façade)
화려한 외관 장식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과 모자이크, 그리고 전쟁에서 얻은 많은 청동 제품들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는 현재는 복제품인 피사의 그리핀도 있다. 피사에 그리핀이 도착한 것은 11세기와 12세기의 여러 피사의 군사적 승리, 특히 1087년 마흐디아 원정과 1113-1115년 발레아레스 제도 원정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핀은 1064년에 시작된 원래 건축의 연장으로, 지붕 동쪽 끝의 앱스 위 박공벽에서 솟아오른 기둥 위의 플랫폼에 놓여졌다. 19세기 초에 대성당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원래 조각상이 지붕에서 제거되고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높은 아치는 이슬람과 남부 이탈리아의 영향을 보여준다. 마름모꼴 모양의 블라인드 아치는 아르메니아의 유사한 구조를 연상시킨다. 회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된 파사드는 색깔 있는 대리석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마에스트로 라이날도에 의해 건축되었다. 세 개의 출입구 위에는 대리석 상감 세공으로 나뉜 네 층의 로지아가 있으며, 그 뒤에는 하나, 두 개, 세 개의 창문이 열려 있다.

대성당은 1595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파사드의 무거운 청동 문은 지암볼로냐의 동료 조각가들에 의해 1602년에 새롭게 디자인되고 제작 및 완성되었으며,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의 비용으로 이루어졌다. 꼭대기에는 성모자상이 있고, 모퉁이에는 네 복음사가가 있다. 부셰토의 묘는 파사드 북쪽 문의 왼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신자들은 처음부터 종탑이 있는 같은 이름의 남쪽 트랜셉트에 있는 성 라니에리 문을 통해 대성당에 들어갔다. 산타 마리아 거리로 접근하는 시민들에게는 대성당에 들어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다. 문 날개는 1180년경 보난노 피사노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1595년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24개의 청동 부조는 신약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청동 문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처음 제작된 것 중 하나이며, 피렌체의 세례당(1329-1336)을 위해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든 청동 문의 전조가 된다.
- 대리석 패널: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패널을 조합한 장식이 파사드를 특징짓고 있다. 코린트식 주두를 채용하는 등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을 모방하고 있지만, 세부가 조잡한 반면 장식은 풍부하여 고전 양식의 인상이 약화되어 있다.[15]
- 아케이드: 외측 아케이드의 아치와 기둥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전적인 파사드로 발전한 장식적인 기법이다.
- 대리석 띠: 대성당 외벽은 색깔이 다른 대리석을 번갈아 사용하여 수평의 줄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중부 이탈리아 건축물에 고유한 장식이다.[15] 겹쳐진 띠 모양은 1층의 블라인드 아케이드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블라인드 아케이드의 석주가 반원 아치를 지탱하는 부분은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13]
- 박공벽: 박공벽에 리드미컬하게 나열된 기둥 열과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을 사용한 장식은 피사 대성당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15]
5. 2. 기타
화려한 외관 장식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과 모자이크, 그리고 전쟁에서 얻은 많은 청동 제품들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는 현재는 복제품인 피사의 그리핀도 있다. 피사에 그리핀이 도착한 것은 11세기와 12세기의 여러 피사의 군사적 승리, 특히 1087년 마흐디아 원정과 1113-1115년 발레아레스 제도 원정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핀은 1064년에 시작된 원래 건축의 연장으로, 지붕 동쪽 끝의 앱스 위 박공벽에서 솟아오른 기둥 위의 플랫폼에 놓여졌다. 19세기 초에 대성당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원래 조각상이 지붕에서 제거되고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높은 아치는 이슬람과 남부 이탈리아의 영향을 보여준다. 마름모꼴 모양의 블라인드 아치는 아르메니아의 유사한 구조를 연상시킨다. 회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된 파사드는 색깔 있는 대리석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마에스트로 라이날도에 의해 건축되었다. 세 개의 출입구 위에는 대리석 상감 세공으로 나뉜 네 층의 로지아가 있으며, 그 뒤에는 하나, 두 개, 세 개의 창문이 열려 있다.대성당은 1595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파사드의 무거운 청동 문은 지암볼로냐의 동료 조각가들에 의해 1602년에 새롭게 디자인되고 제작 및 완성되었으며,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의 비용으로 이루어졌다. 꼭대기에는 성모자상이 있고, 모퉁이에는 네 복음사가가 있다. 부셰토의 묘는 파사드 북쪽 문의 왼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신자들은 처음부터 종탑이 있는 같은 이름의 남쪽 트랜셉트에 있는 성 라니에리 문을 통해 대성당에 들어갔다. 산타 마리아 거리로 접근하는 시민들에게는 대성당에 들어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다. 문 날개는 1180년경 보난노 피사노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1595년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24개의 청동 부조는 신약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청동 문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처음 제작된 것 중 하나이며, 피렌체의 세례당(1329-1336)을 위해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든 청동 문의 전조가 된다.
- 바실리카 양식(십자형 평면 형태): 4세기에 시작된 초기 기독교 교회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단순한 직사각형을 기초로 하여, 중앙 통로와 측랑을 가지고, 거기에 직각으로 뻗어 나가는 횡랑을 더하여 십자형을 이룬다.[15] 라틴 십자형 평면 형태로 설계된 대성당은 합리주의의 걸작이라고도 불린다.[13] 중앙 통로는 5랑식이고, 횡랑은 3랑식이다. 교차부에는 타원형의 돔이 있으며, 팔각형의 딤블로 덮여 있다.[12]
- 돔(중앙의 탑): 벽돌과 돌로 지어진 돔은 피렌체 세례당과 같은 시기인 1090년에 건립되었다. 십자형 교차부는 원래 위까지 외부로 둘러싸인 탑이었지만, 현재는 외벽이 없고, 석조 돔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14세기 토스카나 지방의 교회 양식을 도입한 것이다. 돔을 둘러싼 아케이드는 1383년에 완성되었다.[18]
- 세례당: 세례당은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지름 약 35m, 높이 54.85m이다. 1152년 디오티살비(Diotisalvi)의 설계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완공까지 200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하부는 열주와 아치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이 채택되었고, 상부는 첨탑을 가진 고딕 양식이다. 이는 건축 중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 부자가 고딕 양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긴 잔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직원들의 성악 시연이 1시간에 2회 진행되고 있다.
- 석조 볼트: 석조 볼트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중앙 통로와 측랑의 창을 크게 할 수 있었다.[15]
- 열주랑: 열주랑을 사용함으로써, 벽의 외측 두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석조 볼트 건축 기술의 향상과 벽면 열주랑 사용법의 발전은 채광과 장식상의 개선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방향을 극대화한 것이 후대 유럽의 고딕 건축이다.[15]
- 아치와 기둥: 파사드 외측에 떠오르는 듯한 아치와 기둥은, 이것을 단순히 반복하여 배열함으로써 벽에 가해지는 하중을 줄인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 고딕 시대 건축을 특징짓는 기법이 된다.[15] 정면 하부, 측면에는 개구부가 없는 아치가 연속되고, 파사드 상부는 4층의 개랑이 장식한다. 이 개랑은 피사-루카 양식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12]
- 대리석 패널: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패널을 조합한 장식이 파사드를 특징짓고 있다. 코린트식 주두를 채용하는 등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을 모방하고 있지만, 세부가 조잡한 반면 장식은 풍부하여 고전 양식의 인상이 약화되어 있다.[15]
- 아케이드: 외측 아케이드의 아치와 기둥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전적인 파사드로 발전한 장식적인 기법이다.
- 대리석 띠: 대성당 외벽은 색깔이 다른 대리석을 번갈아 사용하여 수평의 줄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중부 이탈리아 건축물에 고유한 장식이다.[15] 겹쳐진 띠 모양은 1층의 블라인드 아케이드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블라인드 아케이드의 석주가 반원 아치를 지탱하는 부분은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13]
6. 기타
- 10세기 말 피사에서는 3월 25일을 새해 첫날로 정했습니다. 이 날짜는 수태고지 축일(12월 25일 예수 탄생 9개월 전)이자 춘분과 매우 가까운 날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피사의 새해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에는 남쪽 통로의 둥근 창을 통해 빛줄기가 들어와 매년 3월 25일 정오에 같은 지점, 즉 교회 반대편 기둥에 고정된 선반 위에 정확히 닿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선반은 탄생과 새 생명의 상징인 대리석 알 위에 놓여 있습니다. 1750년 새해 첫날은 공식적으로 1월 1일로 변경되었지만, 이 행사는 여전히 매년 성대한 종교 및 시민 축하 행사와 함께 기념되고 있습니다.[10]
- 중앙 통로에 있는 등불은 갈릴레이의 등불이라고 불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통로 지붕에서 이 등불의 진동을 관찰하면서 등시성의 진자 이론을 고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래 등불은 현재 캄포산토에 있는 것보다 더 작고 매우 달랐습니다.
- 북쪽, 캄포산토 앞 파사드 왼쪽 약 눈높이에는 로마 시대 대리석 조각(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장식으로 확인됨)이 있는데, 그 위에는 일련의 작은 검은 표시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표시는 악마가 돔 건설을 막으려고 돔으로 올라갈 때 남긴 자국이라고 하며, 따라서 "악마의 긁힘"이라고 불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악마는 숫자를 세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그 긁힘의 수를 항상 바꾼다고 합니다.)
- 전설에 따르면 제단 오른쪽 작은 기둥 위에 놓인 항아리는 예수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꿀 때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 그레고리오 8세가 이 대성당에 묻혀 있습니다.

7. 성당에 관여한 주요 예술가
다음은 피사 대성당에 관여한 주요 예술가 목록이다.
예술가 | 역할 |
---|---|
치마부에 | 압시스 모자이크 |
잠볼로냐 | 파사드의 청동문 제작 |
안드레아 델 사르토 | 다양한 그림 제작 |
부셰토 | 건축가 |
라이날도 | 신랑, 경간, 파사드 연장 |
굴리엘모 | 원래 설교단과 대리석 장식 |
티노 다 카마이노 | 헨리 7세의 장례 기념비 제작 |
보난노 피사노 | 원래 청동문 제작 |
조반니 피사노 | 설교단 제작 |
니콜라 피사노 | 돔 주위 크라운 제작 |
피에트로 타카 | 십자가와 천사 촛대 제작 |
일 소도마 | 다양한 그림 제작 |
조반니 바티스타 템페스티 | 다양한 그림 제작 |
비두이노 | 대리석 장식 |
줄리아노 뱅기 | 설교단과 본 제단 제작 |
오라치오 리미날디, 지롤라모 리미날디 | 돔의 프레스코화 제작 |
빈첸초 포센티 | 샹들리에 제작 |
위에 나열된 부셰토, 라이날도, 굴리엘모 세 명의 예술가는 대성당에 묻혀 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Western Architecture
Laurence King Publishing
2005
[2]
서적
The Papal Monarchy: The Western Church from 1050 to 125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11-07
[3]
학술지
Archaeometric study of mortars from the Pisa's Cathedral Square (Italy)
https://eprints.whit[...]
2018-10
[4]
서적
Pisa: lo spazio e il sacro
Edizioni Polistampa
2016
[5]
문서
Cronica de Mailros
[6]
간행물
Guida rapida d'Italia
Touring Club Italiano
1994
[7]
서적
Il Duomo di Pisa: il Battistero, il Campanile
1989
[8]
뉴스
La cattedrale si fa bella per la festa dei 950 anni
http://iltirreno.gel[...]
2015-11-24
[9]
웹사이트
Bacteria Cleaned Paintings In Pisa Cathedral
https://www.forbes.c[...]
2019-04-12
[10]
웹사이트
25 marzo: Capodanno Pisano
http://www.associazi[...]
2016-11-08
[11]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9-30
[12]
서적
建築と都市の美学 イタリアⅢ優美 ロマネスク・ゴシック(初版)
[13]
서적
空から見る驚異の歴史シリーズ 世界の大聖堂・寺院・モスク
[14]
서적
建築と都市の美学 イタリアⅢ優美 ロマネスク・ゴシック(初版)
[15]
서적
世界名建築物の謎 世界中から選ばれた50の名建築物をひとつひとつ解読
[16]
서적
空から見る驚異のシリーズ 世界の大聖堂・寺院・モスク
[17]
서적
建築と都市の美術 イタリアⅢ優美 ロマネスク・ゴシック(初版)
[18]
서적
世界名建築物の謎 世界中から選ばれた50の名建築物をひとつひとつ解読
[19]
서적
カラー版 イタリア・ロマネスクへの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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